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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000년 전 반투인들이 철제 기구와 무기를 갖고 모잠비크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천 년이 끝나갈 무렵 모잠비크 해안가의 몇몇 마을이 아프리카 다른 지역과 중동, 인도를 잇는 반투인들의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포르투갈의 항로에 물품 공급 지점을 세우기 위해 모잠비크 지역에 상륙했을 때 현지에 정착한 아랍 무역상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1700년대 중반에 노예무역이 번성하며 포르투갈인들은 내륙으로 이동해 갔으며 본격적으로 이 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20C 초에 이르러 포루투갈인들은 자원을 착취해 가기 시작했으며, 이 때 남아공과 로디지어(Rhodesia)와 함께 남자 노동력이 유출되었다. 1932년부터 1968년까지 포르투갈의 파시스트 리더였던 안토니오 살라자르는 목화나 쌀 같은 현금화하기 쉬운 농작물을 도입하였으며, 15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농장에서 반년 동안 쇠사슬에 묶여 일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이 1960년에 들어서면서 곪아가기 시작했고, 당시 조세 제도에 저항하는 평화시위대에 포르투갈 군인들이 발포하여 6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하면서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모잠비크 해방전선(Mozambique Liberation Front)이 1962년 결성되었고, 포르투갈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10년간 계속된 무력투쟁은 결국 1974년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면서 성공적으로 끝나고, 1975년 6월 모잠비크 공화국이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그리고 그 후 포르투갈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자국으로 떠나갔고, 그로 인한 전문인력과 사회기반의 부족, 그리고 추락한 경제 상황 등으로 정부에서는 구 소련과 동독의 사회주의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프렐리모 정당은 주변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서방에 문을 열기 시작했으며 서방은 식량 원조로 화답했다. 남아공과의 관계는 1980년대 말까지 조금씩 개선되어 갔지만, 1990년 프렐리모 정부가 마르크스 이데올로기를 포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레나모의 협박이 끝났다. 1992년 양측이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교전이 종결되었다.
인종, 언어, 교육, 문화
모잠비크 인종은 대부분 반투어를 쓰는 아프리카 흑인이며. 민족언어학상으로 16개 주요 종족이 있다. 가장 중요하며 최대 규모의 종족은 북부지방의 마꾸아족(Makua)이다. 역시 북쪽에 사는 야오족은 이슬람교도로 18~19세기에 아랍인과 내륙지방 부족들 사이에서 노예무역을 중개했으며, 같은 북부의 마꼰드족(Makonde)은 조각품으로 유명하다. 잠베지 강 북쪽에 살며 이동 농경을 하는 종족들은 모계 사회이고, 잠베지 강 남쪽에 사는 부족들은 부계 사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축이나 농사를 짓고 산다.
모잠비크 내의 주요 종족은 각자의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으나 주로 도회지에서만 사용하고, 남부의 관광지역을 벗어나면 영어는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언어는 에마쿠와어 26.1%, 씨창가나어 11.3%, 엘롬웨어 7.6%, 시세나어 6.8%, 시추와어 5.8%, 기타 부족어 32%, 기타 외국어 0.3% 등이 있다.
모든 교육제도는 포르투갈 방식을 모방하였으며, 초등교육을 의무제로 하였다. 12학년 제로 초등학교 7학년, 중등학교 5학년이며, 1년 3학기 제로 운영된다. 중등학교도 학교시설이 부족하여 오전반, 오후반을 운영하고 있으며, 야간반을 운영하는 학교들도 있다. USAID에 따르면 모잠비크는 여전히 청소년 교육을 보장하기 위한 충분한 학교와 교사가 부족한 형편이고, 특히 여성 성인의 약 50%가 여전히 높은 문맹으로 읽고 쓸 수 없다고 보고했다.
북부 마꼰드 사람들의 조각품은 아프리카의 가장 세련된 예술 형태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1950년대 이래로 재능 있는 화가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가장 유명한 화가는 말랑가따나(Malangatana)로 전 세계에서 전시회를 가졌었다. 모잠비크는 벽화가 유명한데, 상당수는 마푸투의 여러 장식벽에 남아있다.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은 공항 근처의 길이 95m짜리로 혁명에 얽힌 이야기와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