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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현황
- 인구: 약 82,017,514명(세계 18위)
- 수도: 앙카라(가장 큰 도시는 이스탄불)
- 면적: 783,562㎢ (세계 38위, 한반도의 3.5배)
- 종교: 이슬람교 99.8%, 기타 종교 0.2%(개신교 및 유대교 등)
- 민족 구성: 터키인 70~75%, 쿠르드족 19%, 소수 민족 7~12%
- 기후: 서부지역-지중해성 기후, 동부지역-대륙성 기후
- 언어: 터키어(공용어), 쿠르드어, 아랍어
터키는 동서로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대륙의 97%가 아시아에, 3%가 유럽에 위치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서쪽에는 에게해, 북쪽으로는 흑해,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고, 북서쪽으로 마르마라해와도 맞닿아 있다. 유럽 쪽으로는 그리스,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아시아 쪽으로는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총 8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동서 방향으로 긴 지리적 특징 때문에 지역에 따라 다른 기후를 보여준다.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터키의 남서부 해안 지방은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한랭 습윤한,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이다. 터키 중부와 동부 내륙은 계절 차가 큰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고, 일부 동부 산악 지방에서는 겨울 기온이 영하 30℃에서 40℃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역사
BC 7000년 이전에 정착민들이 자리 잡았던 아나톨리아는 BC 1900년경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들은 강성한 국가를 세우고 번성하다가 BC 1200년경에 무너졌다. 그 후 프리지아인과 리디아인에게 점령되었으나 동부지역은 토착왕조인 우라르투(아르메니아)(아르메니아) 왕국 통치 아래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BC 6세기에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 이후 그리스 헬레니즘 세력권 안에 들어갔다가 BC 1세기경에 로마에 넘어갔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양대 세력인 로마 제국(뒤의 비잔틴 제국)과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뒤의 사산 제국) 사이의 완충국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고, 12세기에는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이족이 아나톨리아의 동부와 중부를 차지했으며, 카이족의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그들이 영토를 확장하는 초기 단계에 오스만 일족이 투르크족의 가지스(ghazis:비잔틴 제국에 대항해 싸우는 이슬람교 전사들)를 지도했다.
13~14세기 오스만족은 마침내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동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공국을 점령했다. 15세기에는 더 나아가 발칸 속국들을 직접 통치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유프라테스강(동쪽)과 헝가리(서쪽)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 말경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과 중부 유럽의 헝가리,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오스만 제국은 술탄 쉴레이만 1세(1494~1566)의 통치 이후로는 정치적·행정적·재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718년경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합병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에 발칸 제국 대부분과 이집트의 통치권을 잃었다. 19세기 말에는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분파에게 지방자치를 용인했던 밀레트(비이슬람 종교자치제)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편에 가담했다. 전후 아라비아의 여러 속주와 일부 지역을 잃었지만 격렬한 시민전쟁과 그리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생겼고, 케말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이 탄생했다.
정치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이름을 헌정받을 만큼 터키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터키의 모든 관공서를 비롯한 회사와 노점에도 아타튀르크의 사진이나 어록이 걸려있을 정도이다.
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여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해체될 위기에 놓인 오스만 제국을 구해낸 전쟁 영웅이자, 터키 공화국을 설립하고 근대화된 정책을 도입해 오늘날 터키의 기초를 놓은 뛰어난 정치가이다. 아타튀르크가 펼친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들과 문자 개혁, 여성 참정권 인정 및 여성의 교육에 힘쓰는 등의 근대화 정책들은 터키를 이슬람권 나라들 중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아타튀르크의 강력한 카리스마 속에 세속주의 정책이 펼쳐졌지만 국민들의 99%가 무슬림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후 시간이 흘러가자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정신이 정치,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슬람의 영향력이 강력해질 조짐을 보이자 아타튀르크의 정신, 케말리즘을 이어받은 직속 후계자인 군부가 세속주의 정책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군부는 1960년, 1971년, 1980년, 1997년까지 네 번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교체시키며 케말리즘을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이슬람화되어가는 나라에 맞서 어김없이 일어난 2016년의 쿠데타는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어렵지 않게 제압이 된다. 이로인해 선포된 비상사태 기간 동안 사법, 교육, 언론 등등 여러 분야에서 수천 명이 체포되고 수만 명이 해고당한다. 비상사태가 해제된 뒤인 2020년에도 언론자유지수가 154위이고 수감언론인 수는 1위로, 언론에 대한 탄압과 심한 인터넷 검열은 여전히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말해준다.